반응형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게 지음 |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 |  2014 12 15



 

읽기 전


사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의 제목을 보고서, 저는 책의 내용을 진부한 사랑과 이별 이야기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쉽사리 책장(冊張)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편한 마음으로 쉽게 책장(冊張) 넘길 에세이류의 책을 요량으로 '미움받을 용기' 읽었습니다.

그런데 부분을 조금 읽어가자 책은 편하게 책장(冊張) 넘길 있는 감성적 에세이가 아니란 사실을 금세 알아 차릴 있었습니다. 먼저 서술부터가 독특합니다. 전체가 청년과 철학자 명의 이야기를 주고 받는 문답법(問答法) 형식입니다. 저자는 의도적으로 고대 그리스 시대 소크라테스가 시민들과 문답을 통해 그들 스스로 무지와 편견을 자각하고 진리를 발견한 양식이 독자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읽은 후


책의 핵심 내용은 매우 간단합니다.

 

철학자는 청년에게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사고관을 부정하고 목적론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프로이트의 인과론적 사고 방식에서는, 현재는 바꿀 없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원인으로 하기 때문에 결코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없습니다. 또한 과거의 원인을 지금 바꿀 없기 때문에 그로인해 발생하는 현재의 일을 바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변할 있고, 세계는 단순하며, 누구나 행복해질 있다는 아들러의 목적론적 사고관을 따르면, 과거의 슬프거나 즐거웠던 원인과는 별개로 순전히 내가 부여하는 의미와 목적하는 선택에 의해 현재를 만들어 있다고 말합니다.

 

책의 내용은 확실히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변화를 원하면서도 변화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사람에게 분명 목적론을 근거하여 근원적인 가르침을 줍니다. 하지만 세상사를 풀어가는데 인과론이 문제가 있고, 대안으로 목적론이 효용성을 갖는다고 해서 목적론만이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가다가 보면 인과론적 사고를 통해 얻은 결과가 목적론적 사고를 통해 내가 부여하는 의미와 선택에 영향을 미치기도하고, 반대로 목적론적 사고를 통한 의미 부여와 선택이 인과론의 원인이 되어 뛰어난 결과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너무 뻔한 말이지만, 저는 인과론과 목적론을 정확하게 나누어 어느 하나에 편향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되려, 목적론과 인과론 모두에 익숙해져, 상황과 필요에 맞추어 목적론과 인과론을 적절히 선택하여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면 됩니다.

 

그렇지만, 보통 세상 사람들이 인과론에 익숙해져 있는 감안한다면, 목적론적 사고에 대한 고민은 분명히 필요하다고 말할 있습니다. 그리고 방안으로 '미움받은 용기' 차분히 읽어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가 있어 보입니다.



"세계는 단순하고 인생 역시 단순하다." 만약 이 테제(These)에 얼마간의 진리가 포함된다면 그것은 아이에게나 해당되겠지요. 아이에게는 근로나 납세와 같은 눈에 보이는 의무가 없습니다. 부모나 사회의 보호를 받으며 하루하루를 자유롭게,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갑니다. 미래가 끝없이 펼쳐져 있으니 자신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냉혹한 현실은 보이지 않도록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확실히 아이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죠.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세계는 그 본성을 드러냅니다. '너는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다.'라는 현실을 매정하게 보여주고, 인생 앞에 기다리고 있던 온갖 가능성이 '불가능성'으로 반전됩니다. 행복한 낭만주의의 계절은 막을 내리고 잔혹한 리얼리즘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죠.


정말로 자신 있는 사람은 자랑하지 않아. 열등감이 심하니까 자랑하는 걸세. 자신이 우월하다는 것을 일부러 과시하려고 하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주위에 누구 한 사람 '이런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까 봐 겁이 나거든. 이는 완벽한 우월 콤플렉스라네.


열등감 자체를 첨예화시켜 특이한 우월감에 빠지는 패턴이라네. 구체적으로는 '불행 자랑'이라고 하지. 성장 과정에서 자신이 겪은 불행을 마치 뽐내듯 말하는 사람, 타인이 위로하거나 변화를 권하면 "너는 내 심정이 어떤지 몰라" 하면서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는 사람을 가리킨다네. 이런 사람들은 불행한 것을 '특별' 하다고 여기고, 불행함을 내세워 남보다 위에 서려 하지.자신이 얼마나 불행하고, 얼마나 괴로운지 알림으로써 주변 사람들을 걱정시키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속박하고 지배하려 들지.


반응형
반응형



이기주 저 | 말글터 | 2016 8 29

 

 

1.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나는 엄마가 늘 내가 아픈 걸 혹은 아플까봐 걱정하는 것은 순전히 자식에 대한 애정이라 생각했다. 이 구절을 보고 나니, 자식에 대한 애정 뿐만 아니라 나를 낳고서 부터 계속해서 아팠던 엄마의 경험이 자식에 대한 걱정을 더 하게 만든 것이었다.

 

 

2.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내 사랑은 아직도 작은 사랑인가보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기는 하지만, 내가 싫어하는 걸 상대가 원할 때면 결국은 해주면서도 싫은 티를 꼭 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부끄럽지만 그게 아직 내 사랑의 크기이다.

 

 

3.

특히 난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일을 처리할 때면 그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 시간과 추격전을 벌이다가 막다른 길에서 붙잡히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가 참 못마땅하다. 그리고 가끔은 뭐가 뭔지 갈피를 못 잡겠다. 정말 바쁜 것인지, 아니면 '바쁘다'는 걸 누군가에게 알리고 싶은 것인지....

 

나는 일을 할 때면 항상 시간에 쫓긴다. 시간에 쫓기지 않아도 될 만큼의 여유가 있어도, 굳이 일의 퀄리티를 들먹이며 스스로를 몰아 붙인다. 그리고 결국에는 버거워 한다.

 

참으로 한심하고 우스운 일이다. 아니라고 하면서도 스스로 몰아 붙이는 걸 누군가는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내 자신은 알기 때문이다.

 

 

4.   

단테의 <신곡 神曲> 지옥 편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지옥문 입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그대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독사가 우글거리고 불길이 치솟는 곳만 지옥일 리 없다. 희망이 없는 곳, 아무런 희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 영원히 지속하는 곳, 그곳이 진짜 지옥이다.

 

그렇다. 세상에 꺾이고 꺾여도 희망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늘 그렇듯이 소중한 진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다.

 

가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모래밭에서 바늘 찾아도 불평을 늘어 놓기 보다는 바늘을 찾으러 달려 들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운 좋으면 바늘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혹시 누가 아는가, 바늘 만큼의 가치는 아닐 지라도 조그마한 쇠붙이라도 찾을 줄.....  

 

 

5.

영화나 동화 속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내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때때로 무기력하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기는커녕 오히려 사랑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사랑은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을 지닌다.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이밀기도 하지만,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의 동아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를 망가뜨리지 않는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사랑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미성숙해서 칭얼거리는 내 사랑에 푹, 꺾이곤 한다. 꺾이고도 체면치례 탓인지, 별 일 아닌 척 한다

제일 좋기로야 내 사랑이 칭얼대면 다 안아주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칭얼대는 내용마저 판단의 영역에서 놓고 가름질 하는 내 미성숙함은 그럴 아량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차선책으로나마 칭얼거림에 꺾이면서도 괜찮은 척 하는 것이리라. .

내게서 사랑과 희망을 찾고 싶어서라는 내게 칭얼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얼른 칭얼거림을 다 보담아 안을 수 있는 아량을 가져 내 사랑이 내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싶다.

 

 

6. 

에세이에는 여백이 많은 책일 뿐만 아니라, 내게 많은 여백을 만들어 주는 책이다

어린 시절, 나는 책은 응당 지식을 전달하는 매개체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훈육을 받고 자랐다. 그래서 그 시절 소설과 수필은 제대로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 그 때문일까,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에세이를 읽을 때면 그 즐거움과 재미와는 별개로 책에 있는 여백과 바쁜 현실에 만들어 주는 여백으로 마음 한 켠이 불편했다.

물론 나도 안다. 세상 모든 종이가 학창 시절 숙제로 제출하던 깜지 마냥, 활자로 빽빽히 채워질 필요는 없다. 그리고 지식의 전달만이 책의 목적도 아닐 뿐더러 책에서도 삶에서도 여백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교육이 힘도 만만치 않아 간단하게 하는 메모마저 깜지처럼 만들어 버리는 내 자신을 보면, 에세이를 읽으며 느끼는 불편함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 같다.

반응형

'Books > Novel & Art'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로하, 나의 엄마들  (0) 2023.07.17
데미안  (0) 2019.02.16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0) 2018.11.01
낙타샹즈  (0) 2018.10.15
살인자의 기억법  (0) 2018.09.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