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ma

화양연화 특별판, 花樣年華, In The Mood for Love - 25th Anniversary Special Edition

고무풍선기린 2025. 12. 31. 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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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25.12.31.  

관람: 동탄CGV

 

Prologue

 90년대 말 시네마 키드들은 단순히 함께 모여 영화를 관람하는 것을 넘어, 씨네21과 같은 영화잡지를 탐독하고, PC통신 영화 동호회에서 그 내용을 소통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그들은 백색의 눈과 연분홍의 흩날리는 벚꽃의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 준 ‘러브레터(1995)’, ‘4월 이야기(1998)’의 감독 이와이 슌지, Shunji Iwai에 열광하였습니다. PC통신 동호회원들이 모여 한국에서 정식으로 수입되지 않은 이와이 슌지 감독을 비롯해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을 카페에서 함께 관람하고 소감을 나누는 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 이와 함께 떠오른 영화가 90년대 초반까지 인기 있었던 화려한 총격씬의 홍콩 누아르 영화 이후 등장한 왕가위 감독으로 대표되던 뉴웨이브 스타일의 영화였습니다.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 그리고 엇갈리는 사랑을 다루던 뉴웨이브 영화 역시 씨네21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 동호회가 탐닉한 주요 장르의 영화였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 제 눈을 사로잡은 건 투명한 빛을 활용해 서정적인 영상미를 보여준 이와이 슌지의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화양연화(2000)’과 같이 홍콩 뉴웨이브 영화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패왕별희 30주년을 기념해 재개봉한 ‘패왕별희 디 오리지널(2024)’을 관람하면서, 홍콩 뉴웨이브 영화를 비롯한 중화권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오늘 ‘화양연화 특별판’을 관람했습니다.

 

People & Story

 감독: 왕가위, 王家卫, Wong Kar-wai 

 주연: 장만옥,  張曼玉, Maggie Cheung

          양조위, 梁朝偉, Leung Chiu-wai

 유감스럽게도 감독과 주연배우 모두 영화판에 족적을 남긴 사람들인데, ‘화양연화’를 보기 전까지 이들이 연출하거나, 출연한 영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장만옥과 대표적인 동시대 여배우였던 임청하, 왕조현, 매염방, 양자경도 이름만 귀에 익숙할 뿐 제대로 본 영화는 없습니다. 양조위 또한 생김새만으로 장국영과 헷갈렸습니다. 두 배우 모두 이미지가 마초적 남성성보다는 왜소하지만 섬세한 연기력의 배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인 듯 합니다. 감독인 왕가위 역시,  ‘중경삼림(1994)’, ‘타락천사(1995)’, ‘해피투게더(1997)’ 모두 평단과 관객의 호평을 받은 영화를 연출했지만, 제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Naver 발췌)

  1962년, 같은 날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첸 부인’과 ‘차우’. 이사 첫날부터 자주 마주치던 두 사람은 ‘차우’의 넥타이와 ‘첸 부인’의 가방이 각자 배우자의 것과 똑같음을 깨닫고 그들의 관계를 눈치챈다. 그 관계의 시작이 궁금해진 두 사람은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다, 점점 빠져들고 만다. 안타까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결국 이별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2001년, 다른 모습으로 재회하게 된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보면서

 영화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영화의 색감이었습니다. 90년대 말 이와이 슌지의 영화가 밝고 맑은 백색이었던 것에 반해, 왕가위 감독의 이 영화는 어두운 검은색이 먼저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붉은색과 초록색이 눈에 들어왔는데, 작년에 봤던 ‘패왕별희’에서도 영화의 색채가 어두운 검은색과 붉은색이었던 기억이 있어, 검은색과 붉은색이 중화권 영화의 색감인가하는 생각이 잠깐 머리를 스쳐갔습니다. 

 이야기 전개는 영화의 색상의 변화와 괘를 같이 합니다. 영화 도입부의 색감은 어두운 검정색입니다. 서로의 이웃에 살지만 서로 배우자가 불륜관계라는 걸 알아차리면서 이 둘의 관계는 시작됩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건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차별화되는 그들의 의상입니다. 첸부인은 몸에 딱 달라붙는 치파오를 일할 때도, 집 앞에 국수를 사러 나갈 때도, 그리고 차우를 만날 때도 입고 있습니다. 항상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습니다. 이건 차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겉으로 표현하지 않지만 서로의 배우자가 불륜관계에 빠져 있는 우울한 일상은 어두운 검은색과 잘 어울립니다. 

 그런데 두 사람이 갖는 공통의  공허함은 역설적으로 이 둘을 가깝게 해줍니다. 우울한 검은 일상에서 서로에게 감정이 싹터 가는 것을 조명과 커튼, 그리고 첸부인의 붉은 치파오가 보여 줍니다. 하지만 이 둘은 그들만이 있는 붉은색의 공간에서조차 단정한 치파오와 정장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검은색 일상에서 붉은색 욕망으로 가고 싶어하지만 단정한 치파오와 정장을 벗어 던지지 못하는 그들은 서로의 손도 쉽게 잡지 못합니다. 욕망도 자신이 규정한 모습에서 벗어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들의 복장의 단정함은 감정을 억제하고 절제하며,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모습을 초록색 색채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욕망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며 영화의 색상은 다시 어두운 검은색으로 바꿉니다. 홍콩에서 싱가포르에서 욕망을 서로 꿈꾸지만, 역시 금세 초록색과 검은색이 붉은색을 대신 합니다.

 

 그런데 왜 제목은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을 뜻하는 ‘화양연화((花樣年華)’일까요? 이들의 인생에서 주저하며 손 한번 제대로 잡지 못한 그 때가 그들의 화양연화였던 것일까요? 

 

Epilogue

 자신이 규정한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기회비용(Opportunity Cost)에 대한 아쉬움을 사람들은 화양연화로 느끼는 것일까요? 사실 아직도 저는 영화 속 모습이 진정한 화양연화인지 흔히 말하는 리즈시절이 화양연화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억지 결론을 내자면 리즈시절은 내가 가장 빛나던 순간이고, 화양연화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파하며 살아있음을 느낀 순간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을 듯 합니다. 

 그리고 연극으로 만들어도 될 것 같은 제한적인 배경과 대사 중심의 느린 전개가 이와이 슌지와는 대척점에 있는 왕가위의 스타일이고, 이것이 홍콩 뉴웨이브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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